□ 한국 최초의 강경침례교회
강경침례교회는 대한민국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남교리에 위치한 기독교한국침례회 소속의 교회이다. 1896년 2월 9일 미국 보스턴 클라멘톤 침례교회 엘라씽기념선교회에서 파송한 폴링선교사와 스테드만선교사의 선교로 지병석집사 자택에서 시작되었으며, 한국 최초의 침례교회입니다.
| 최초 예배지 지병석집사 자택 |
1906년 본 교회에서 침례회 최초의 총회가 열렸으며, 그때부터 개설한 성경학교는 현재 대전에 있는 침례신학대학교로 발전하였다. 1943년 5월 일제의 탄압으로 옥녀봉 일대 교회 대지 9,900㎡가 신사당으로 몰수됨으로써 강경침례교회는 잠시 문을 닫기도 하였으나, 8·15 해방이 되자 윤석훈, 라상순 집사와 성도들의 노력으로 강경읍 홍교리에 있던 일본인들의 사찰을 교회당으로 삼아 다시 교회를 열었다.
6·25 전쟁 당시 교단 총회장이었던 이종덕 목사는 9·28 서울 수복 시 퇴각하던 공산군에게 금강변 갈방으로 끌려가 순교하였다. 1951년 김용해 목사, 1953년 박성태 전도사, 1956년 김장해 목사, 1960년 윤석훈 목사, 1963년 김종운 전도사, 1966년 최낙규 전도사, 1968년 유흔태 전도사의 사역과 성도들의 믿음으로 1971년 유흥래 목사 안수, 윤칠원과 문헌봉을 집사로 안수한 후 1972년 강경읍 남교리 82-12번지[옥녀봉로 10] 660㎡를 매입하여 강경침례교회 건물을 신축 이전하였다.
1974년 정호일 목사 부임 및 성전 완공과 목사관을 건축하였고, 1977년 윤칠국 집사 안수 헌당예배를 드렸다. 1986년 교회 부지를 확장하기 위해 강경읍 남교리 103번지[옥녀봉로 10] 712.8㎡를 매입하였으며, 익산시 성당면 성당리 산 71-8번지의 대지 4,620㎡를 묘지로 매입하였다. 1991년 박창근 목사 부임 부활의 신앙으로 순교회 전통을 이어받아 1996년 강경침례교회 100주년을 맞았다. 현재 유금종목사가 담임목사로 있다.
| 강경침례교회(출처:강경침례교회) |
□ 지병석집사
지병석집사는 1896년에 한국 최초의 침례교회인 강경침례교회를 설립한 사람이다. 지병석집사는 인천과 강경을 오가면서 소금 및 포목장사를 하다가 1895년 전도되어 서울에서 침례를 받았다. 지병석집사의 생가는 강경 옥녀봉에 있으며, 이곳은 한국침례회 태동의 예배지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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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병석집사 |
□ 폴링선교사
에드워드 클레이턴 폴링(Edward Clayton Pauling, 1861년 1월 21일 ~ 1920년 5월 19일)은 미국의 침례교 선교사다. 1895년 한국에 파송되어 강경침례교회를 설립하고, 강경, 칠산, 공주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했다. 1920년 한국에서 사망했다.
파울링 선교사는 1895년 미국 침례교회 계통의 선교단체 “엘라 딩 기념선교단”에서 제1진으로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 중 한 분이다. 그는 1895년 말콤 펜윅과 함께 고든으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1896년에는 한국 최초의 침례교회인 강경침례교회를 지병석집사와 함께 설립하였다.
그 후 충남 공주와 강경, 칠산 (부여) 지역에 선교와 전라도 지역의 선교를 집중하던 미국 남장로교단과의 선교 분할 협정이 이루어져 충남 선교를 주로 하였으나 1899년 귀국하여 스테드만 선교사가 강경으로 선교지를 옮기고 폴링 선교사가 살던 주택을 예배당으로 개조하고 지병석과 가드라인 선교사와 함께 전도사역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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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링선교사 |
□ 말콤 펜윅 선교사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1863-1935)은 미국의 침례교 선교사다. 1863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1889년 한국에 첫발을 디뎠다. 펜윅은 한국에서 46년간 선교사로 활동하며, 한국 기독교의 초석을 놓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특히 한국인 목사를 양성하고,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데 힘썼다. 또한, 그는 한국의 사회 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여성 교육과 의료 사업을 지원했다. 펜윅은 1935년 한국에서 사망했지만, 그의 업적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아 있다.
펜윅은 한국에 도착한 후, 서울에서 잠시 머물다가 황해도 소래로 이동했다. 그는 소래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교회를 세웠다. 1893년에는 침례교 목사 안수를 받고, 원산을 근거지로 선교 활동을 펼쳤다. 펜윅은 원산에서 만주와 시베리아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했다. 그는 또한, 권서인 순회 전도를 통해 오지 선교를 펼치며, 한국 기독교의 영역을 넓혔다.
펜윅은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데에도 큰 공헌을 했다. 그는 1900년부터 1911년까지 11년 동안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이 성경 번역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펜윅은 또한, 찬송가집을 편찬하고, 기독교 잡지를 발행하는 등, 한국의 문서 선교에도 힘썼다.
펜윅은 한국의 사회 개혁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여성 교육과 의료 사업을 지원했으며,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립했다. 그는 또한, 한국의 독립운동에도 관심을 갖고, 독립 운동가들을 지원했다. 펜윅은 1935년 한국에서 사망했지만, 그의 업적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아 있다. 그는 한국 기독교의 초석을 놓고, 한국의 사회 개혁에 기여한 선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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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콤 펜윅 선교사 |
□ 스테드만 선교사
스테드만 선교사(Horace Grant Underwood, 1859-1930)는 미국의 북장로교 선교사이다. 1859년 미국 미시간주에서 태어나 1885년 한국에 첫발을 디뎠다. 스테드만은 한국에서 45년간 선교사로 활동하며, 한국 기독교의 초석을 놓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특히 한국인 목사를 양성하고, 의료 사업을 지원하는 데 힘썼다. 또한, 그는 한국의 사회 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교육과 복지 사업을 지원했다. 스테드만은 1930년 한국에서 사망했지만, 그의 업적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아 있다.
스테드만은 한국에 도착한 후, 서울에서 잠시 머물다가 평양으로 이동했다. 그는 평양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교회를 세웠다. 1887년에는 북장로교 목사 안수를 받고, 평양을 근거지로 선교 활동을 펼쳤다. 스테드만은 평양에서 전국 각지로 가서 복음을 전파했다. 그는 또한, 의료선교를 통해 오지 선교를 펼치며, 한국 기독교의 영역을 넓혔다.
스테드만은 의료 사업을 지원하는 데에도 큰 공헌을 했다. 그는 1885년 평양에 제중원을 설립하고, 1894년에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설립했다. 이 병원과 학교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의료 기관과 교육 기관이었다. 스테드만은 또한,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립하고, 교육과 복지 사업을 지원했다.
스테드만은 한국의 사회 개혁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여성 교육과 의료 사업을 지원했으며,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립했다. 그는 또한, 한국의 독립운동에도 관심을 갖고, 독립 운동가들을 지원했다. 스테드만은 1930년 한국에서 사망했지만, 그의 업적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아 있다. 그는 한국 기독교의 초석을 놓고, 한국의 사회 개혁에 기여한 선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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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테드만 선교사 |
강경 여행 시에 종교를 떠나서 우리나라의 근대문화에 기여했던 사람들의 업적을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못하는 교육, 의료 등에 대해서 우리나라의 초석이 된 훌륭한 분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나라의 교육, 의료 등은 어떻게 되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