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통교
조선시대 도성 내에서 가장 큰 다리로 길이 약 12m, 폭 15m로 길이보다 폭이 넓은 다리였으며, 조선 초 도성을 건설할 때 흙으로 다리를 놓았으며, 태종 10년(1410) 홍수로 다리가 유실되어 태조 이성계의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 옛 터의 병풍석 등 석물을 사용하여 석교로 만들었다.
이후 1760년 경진준천을 한지 2년 후인 영조 38년(1762)에 다리의 기초 부분 개축과 난간을 보수하였다. 이후 1899년 전차 가설, 1910년 전차선로를 복선화 등으로 다리 본체는 도로 밑에 묻히게 되었다. 1958년에 청계천 복개공사로 난간만 창경궁, 창덕궁 등으로 이전되었고 다리는 다시 몯혔었는데 2005년 청계천 복원되면서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
❏ 광통교 역사
태조 이성계 살아생전에는 아버지의 눈치 때문에 신덕왕후릉(정릉)을 어쩌지 못했던 태종은, 아버지가 죽자 신덕왕후에 대한 복수를 시작했다.
우선 경복궁 코 앞에 있던 신덕왕후릉(정릉)을 사대문 밖인 지금의 정릉동으로 옮겨버렸고, 원래 정릉에 사용했던 석물들을 그 자리에 파 묻었다.
그러다가 때마침 흙으로 만들었던 청계천의 광통교가 홍수에 떠내려가자 땅에 파묻었던 정릉 석물을 다시 파내어 광통교의 복원에 가져다가 쓴 것이다.
백성들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던 왕릉의 석물들을 발로 밟고 지나다니도록 한 것이다.
이방원이 정릉 석물들을 광통교 밑에 처박아 놨기 때문에 청계천에 잠겨 사람 손이 타지 않았고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21세기까지 남아있다는 것이다.
❏ 광통교 석물
조각들을 보면 구름에 휩싸인 도사나 스님이 들고 다니는 금강저등이 보이는데 도교적이거나 불교적이어서 아직 유교 문화가 강고히 정착하기 이전 고려 말 조선 초의 문화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다른 석물과는 달리 편평하지 않고 가운데 부분이 살짝 튀어나온 돌에는 영저와 영탁이 새겨져 있다. 방울처럼 생긴 것을 영탁, 그 옆에 있는 것을 영저라고 하는데, 원래 불교의식도구인 금강령(요령)과 금강저를 나타낸 것이다.
특히 금강저에는 중앙에 조선왕조의 어기에도 그려저 있는 태극 문양이 있어서 흥미로움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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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탁과 영저의 금강저 |
광통교에는 정릉에 있던 여러가지 석물들이 있다. 광통교 위에 석물은 정릉묘 앞에 세워져있던 석물이며, 정릉 주변을 둘러싼 석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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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릉 묘 석물 |
❏ 문간공 이서가 조성한 석물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 옛 터의 병풍석 등 석물들은 문간공 이서(홍주이씨)가 생존 시에 1396년 8월(음)에 직접 감독하여 조성하여 만든 정릉(貞陵)에 있었던 석물이다.
이서(李舒, 1332년 ~ 1410년)는 1398년[67세] 태조 7년 8월 13일 3년간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 능지기를 했다.
문강공 이서(李舒, 1332년 ~ 1410년)는 조선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어 안평군(安平君)에 봉해지고, 1400년 태종이 즉위하자 문하시랑찬성사에 이어 우정승으로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광통교 : 서울 중구 남대문로1가


